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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교민수 및 내전 이유 (쿠데타)

by 모든 정보 제공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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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내전은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국가 수단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종교와 언어,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지역간 갈등, 파벌간 권력 투쟁 등으로 여러 차례 이어진 전쟁입니다. 20세기 초 영국 식민지 시절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통치되었던 수단이 1946년 통합되면서 종교와 언어의 차이로 인한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지속적인 내전으로 발전했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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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교민수 및 내전 이유

수단 내전 정의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수단 공화국에서 종교와 언어, 석유와 같은 부존 자원 수입 배분을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내전 및 파벌 간 권력 투쟁으로 일어난 무력 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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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고대로부터 수단 지역은 아프리카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전통이 만나는 각축장이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수단은 처음에는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그 후 독립국가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남수단과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남수단은 많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원주민 종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2011년 남부지역이 분리 독립을 하기 전까지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8%가 넘는 면적을 가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면적이 가장 큰 나라였다. 수단 내전의 주요 원인은 수단을 지배했던 영국의 식민 정책 차이 때문에 비롯되었는데, 1946년까지 영국은 식민지였던 수단의 북부와 남부를 분리하여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 북부는 아랍계 이슬람교도가 다수였고, 남부는 이웃한 케냐와 같이 기독교와 다신교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946년 영국 정부가 남부와 북부를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북부의 아랍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등 북부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자 영어로 훈련받았던 남부 수단의 지도자와 관료들의 반감이 누적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55년 수단 의회의 독립 선언에 이은 1956년 수단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수단 내전(1955~1972)

1955년 남북부를 통합한 수단의 독립이 선언되자 남부의 육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남부 주민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무력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과의 전투가 내전 양상으로 발전했으며, 1972년 에티오피아의 조정에 따라 남북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부에 대폭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내전은 종식되었습니다.

제2차 수단 내전(1983~2005)

1983년 9월 니메이리 정권이 이슬람 법의 도입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남부는 반정부 조직인 수단 인민해방운동(SPLM)을 결성하고 산하에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는 군사조직인 수단 인민해방 그룹(SPLA)을 두고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니메이리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붕괴한 후 들어선 마흐디 정권은 내전 종결을 목표로 1988년에 SPLM과 정전협정을 조인했는데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반대로 발효되지 못했습니다.

1989년 오마르 하산 알 바시르 준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SPLA는 대정부 공격을 강화했습니다. 1991년 바시르 정권은 7년에 걸친 내전 종결을 위한 연방제 이행을 선포했지만, SPLA는 계속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전쟁을 피해 400만 명이 넘는 남부 수단 주민들이 인접 도시나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이집트 등 인접 국가로 탈출하면서 난민이 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다르푸르 서부 지역에서 수단해방운동(SLM)을 중심으로 새로운 반군이 형성되었으며,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기아와 질병, 전투 중 학살 등으로 다르푸르 지역 주민의 피해도 확산되었습니다. 2004년 차드와 아프리카 연합(AU) 등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재개되었으며 아프리카 연합의 요청으로 르완다군과 나이지리아군 병력이 휴전 관리를 위해 파병되었습니다.

차드와 수단 사이의 국가간 전쟁 상황으로까지 발전한 이 내전 상황에서 남부 반군과 수단 정부 사이의 평화 협정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200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향후 6년 동안 남부가 자치권을 갖고, 이후 탈퇴에 대한 국민투표를 통해 분리 여부를 결정하며, 유전에서 나오는 수입은 북부와 남부가 균등하게 배분하고, 이슬람법은 우선 북부에서만 적용하는 내용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내전은 종식되었습니다.

지속되는 분쟁

이후 2011년 1월 남수단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압도적으로 독립이 가결됨에 따라 2011년 7월 9일 주바를 수도로 하는 남수단 공화국이 독립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단 공화국 안에서 정치적 주도권 쟁탈을 위한 무력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2011년 이후 오마르 알 바시르 군사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대규모 시민 불복종 시위가 계속된 끝에, 2019년 시민 혁명으로 불리는 쿠데타가 성공하여 알 바시르가 축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2019년 8월 헌법이 개정되어 민간인과 군대표가 같은 비율로 참여하는 과도기통치기구가 설치되었고, 압달라 함독 총리가 이끄는 군부 민간 통합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10월 압델 파타 알 부르한 육군참모총장과 민병대에 기원한 수단 신속지원군 (RSF) 사령관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가 다시 쿠데타를 감행, 알 부르한이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알 부르한 정부는 2023년 민간 주도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기로 하고 신속지원군을 수단 정부군에 통합하려고 시도했으나 신속지원군 사령관 함단 다갈로가 신속지원군의 통합 일정과 이후 지휘체계에 대하여 반발하면서 2월 들어 수단 정부군과 신속지원군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4월 11일 신속지원군이 수단 수도 하르툼을 비롯한 주요 군사기지를 향해 전진배치되고, 13일 무력 시위를 시작하면서 분쟁이 가시화되었습니다. 4월 15일 신속지원군은 하르툼과 수단 정부군 기지에 대해 무력 기습을 단행했습니다. 이후 하르툼에 있는 대통령궁과 국영방송국, 하르툼 국제공항을 포함한 주요 시설에서 수단 정부군과 신속지원군 사이의 격렬한 무력 충돌이 계속되면서 도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되었습니다.

수단 북부 다르푸르의 주도인 알파시르에서도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수단 공화국에 체류하던 외국 주민과 대사관 직원들의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단 교민 수

4월 23일 기준 수단에 체류 중인 한국인 29명 가운데 28명은 모두 수도 하르툼의 한국대사관에 모여 대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이들은 모두 안전한 상태로 수단 국적을 가진 한국인 1명만 대사관에 오지 않았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교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이동 계획과 관련해 현재 여러 정보를 종합해 가장 안전한 대피 계획이 무엇인지 파악 중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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