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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 및 학습자 소질 탐색
초등교육의 소임은 메타학습뿐인가? 초등교육은 분명 학습에 대한학습을 통하여 주체적인 학습의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일을 본령 (으로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본질적 역할이 하나 더 있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다음에서 보게 될 것처럼 주체적인 학습의 역량을 갖추는 일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점에서 지금 이야기하려는 초등교육의 본질적인 소임과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소임이 별개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초등교육의 본질은 이 두 가지 초등교육의 일이 상호작용하면서 동시에 전개될 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의 무궁무진한 원천이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존재로 성장시킬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성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의존할 수 있는 활동들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활동은 바로 교육일 것이다. 우리는 교육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의 가능태(可能態)를 현실태(現實態)로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교육을 통한 성장의 가능성은 누구보다도 초등학생들, 즉 체계적인 학습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게 될 학습자들에게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은 가능성일 뿐이며, 현실로서 초등학생에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러한 초등학생 각자의 소질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아 이를 실현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문제는 이른바 적성검사와 같은 심리측정술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분야도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내재된 가능성의 실체와 그것이 개화(開花)될 수 있는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예측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간의 가능성과 그것이 개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서의 소질이나 적성은 초등교육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초등교육은 우리가 앞에서 규정한 것과 같은 새로운 의미의 초등교육이다. 그 대체적인 경로는 이러할 것으로 짐작된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모든 분야에 대하여 소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런 축복받은 초인(超人)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략 한두 개의 소질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소질의 방향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해결의 방식은 이러한 것이다. 초등교육을 통하여 초등학생은 학습의 보람과 그러한 보람을 가져오는 학습 활동의 수행 능력을 체득하게 된다. 그런데 체득된 그 학습의 능력, 즉 학습의 활동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교과에서 모두 성공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교과는 초등학생이 자기 나름의 문제를 설정하여 이를 해결하는 활동을 원활히 전개할 수 있고, 또 어떠한 교과는 노력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제의 해결이 여의치 않을 때가 있다. 이러한 경험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함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학습이 가능한 분야, 학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교과들이 바로 그 학습자의 소질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학습자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스스로의 교육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세계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초등교육의 본질적인 역할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초등교육이 학습하는 방법에 대한 학습으로 전개될 것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학습의 역량을 시험하고 학습의 결과에 감흥(感興)하도록 하면서 교과에 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수준까지 주어진 시간에 도달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과공부를 시킬 경우, 그 교과와 관련된 소질과 가능성을 지닌 학습자조차도 그 교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학습자의 가능성의 방향과 소질을 탐색한다는 초등교육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를 중등교육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현재 우리의 중등교육은 10여 개 이상의 이질적인 교과에서 균등한 성취를, 가능하다면 전 교과(全敎科)에서 100점을 받을 것을 학습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중등교육의 교과학습에서 다루고 있는 교과들이 서로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이질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요구에 가깝다. 그렇게 운영되는 중등교육은 자신의 소질과 적성도 모르는 몰개성적인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우리의 경우 대학에 들어설 때까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대학의 전공에 만족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학습자들의 사례가 허다하게 보고되고 있다. 이는 원칙상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의 책임이라 보기 어렵다. 대학에 들어서는 학습자는 자신의 소질과 가능성을 탐색한 뒤, 해당 분야의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입학한다는 것을 고등교육은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중등교육, 더 나아가서는 초등교육이 학습자들에게 어떠한 교육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데서 찾는 것이 현명하다.
초등교육의 단계에서 학습자가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그 세부적인 사항과 구체적인 진로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탐색할 수는 없다. 교사의 도움을 받아 대략적인 방향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며, 또 초등교육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초등교육이 학습자의 소질과 가능성의 커다란 방향을 확인한다는 소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 이를 이어받아 중등교육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 모든 교과를 일률적으로 제공하고 균등한 성취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초등교육을 통하여 탐색된 학습자의 소질의 방향과 부합하는 교과들을 중심으로 심화학습(深化學習)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른 교과들은 필요한 만큼 교양교과로 학습하도록 하 중등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심화교과학습'과 교양교과차별화되면서 조화를 맺는 이러한 양상이 아마도 제대로 된 중등교육의 모습일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교육에서는 학습자의 소질이 수리·과학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정도를 식별해 주면, 중등교육에서는 이 방향에 부합하는 교과들을 깊이 있게 학습하도록 하고, 다른 교과들은 균형 있는 교양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까지 학습하도록 요구한다. 학습자는 이처럼 특화된 중등교육의 교과학습을 통하여 수리·과학 분야 가운데서도 그의 소질이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어떤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 예를 들어 수학인지, 물리인지, 생물인지를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고등교육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형성하는 제도교육이 가능하려면, 중등교육은 학습자의 소질과 부합하는 특색 있는 교과학습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며, 그에 선행하여 초등교육은 학습자의 소질과 가능성의 커다란 방향을 탐색한다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초등교육이 다양한 교과들을 활용하여 학습자의 소질과 적성의 방향을 탐색하는 교육적 소임을 지닌다'는 말은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초등교육의 현장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면서도 그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초등학교의 교사가 생활기록부에 해당 학생의 질적인 특성을 기술할 때, 많은 경우 교사는 학생이 '어떠 어떠한 교과목들에 흥미와 소질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식의 평을 쓴다. 여기서 우리는 다양한 교과들을 활용하여 학습자의 소질과 적성의 방향을 감식교육적 소임이 이미 초등교육의 현장에서 어한다는떤 형태로 수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초등교사가 복수의 교과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초등교육의 이러한 소임이 지니는 특징과 의의는 초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생에 대한교사의 질적 평가를 중등교육의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교사가 하나의 교과를 전담하게 되는 중학교부 터는담임 교사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교과와 관련된 학생들의 흥미나 소질에 대하여 알기가 어렵다. 그가 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해당 학생이 ‘급우 관계가 원만하다거나, 미술부로 활동하고 있다거나, 성격이내성적이다'라는 정도에 그친다. 여기서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비록 본격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제안한 초등교육의 두 번째 소임이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 귀중한 소임이 중학교부터는 단절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학습자의 소질과 적성을 찾는다는 교육적 소임이 너무도 빨리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후자는 전체 제도교육의 원활한 운행이라는 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초등교육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질 자신의 교육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세계를 찾고, 이 세계를 중심으로 주체적인 학습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학습자를 기르는 교육이며, 이 일이 종료되는 시점이 아마도 초등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이행(移行)하는 때가 될 것이다. 초등교육이 이 일을 제대로 하는 데에 몇 년이 필요한지는 모른다. 또 그것은 학습자마다 편차(偏差)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6년 이하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초등학교 속에서의 초등교육은 6년 이내에 잠정적으로 완결되는 것이며, 만약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제도상 중등교육기관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초등교육의 장이 된다.
만약 초등교육이 이러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다면,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아마도 단일한 교과가 아니라 다양한 복수(複數)의 교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단일한 교사가 초등학생에게 학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교과를 학습의 소재로서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을 때, 그 교사는 특정한 초등학생의 소질, 즉 가능성의 실현 방향이 자신이 제공한 복수의 교과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어느 쪽의 교과를 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가 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처럼 하나의 교과만을 전담한다면, 초등학생들의 가능성의 방향이 상대적으로 어느 교과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판단할 수가 없게 된다.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도 교과전담제(敎科專制)를 통하여 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처럼 교과에 대한 전문성을 높은 수준에서 확보하자는 의견은, 만약 초등교육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금의 우리 논의가 맞다면, 신중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예체능 교과들을 대상으로 교과전담제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초등교육의 본질적 소임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조처라야 한다. 단순히 그러한 교과들까지 한 사람의 교사가 담당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는 자칫하면 모든 교과를 전담제로 운영하자는 주장으로 변질될 수 도 있다. 중동교사가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하자는 식이어서도 안된다. 초등교육의 교육적 소임과 관련하여 논의가 전개되기보다는 특정교과의 성격만을 강조하여 전담제를 거론하거나 중동교사의 모습을 모방하는 쪽으로만 흐를 경우 그것은 분명 초등교육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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